분재가(Dwarf Hawaiian Tree Umbrella)있는 창가에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다.
분재의 초록빛 잎이 햇살을 받아 자라나는 풍경에서 생명의 찬가를 듣고 있다.
몇 해 전 방송국 근무 시절에 지인이 선물했던 분재를 감사한 마음으로 애지중지하며 키워왔다.
평상시에는 쌀뜨물을 주고 비가 올 때면 잎사귀가 흠뻑 젖도록 비를 맞게 해주며, 햇볕 드는 창가에 두고 잘 자라도록 정성들여 가꾸어 왔다.
날이 갈수록 사람의 몸매를 닮아가는 분재의 몸통이 영락없는 사람의 몸통처럼 튼실하다.
분재에게 아침저녁으로 정겹게 사랑의 말을 걸어준다.
아침에는 ‘오늘도 햇볕 많이 받고 쑥쑥 잘 자라도록 해라.’ 저녁에는 ‘오늘 하루도 많이 자라났구나.’ 이러한 사랑의 대화를 하며 그윽한 눈빛으로 교감하고 있다.
분재는 정성에 보답이나 하듯이 가지는 무성한 짙푸른 잎을 키워 싱싱하게 자라나고 있다.
초록 잎사귀를 통해 싱그럽게 뿜어내는 분재의 풋풋한 숨결이 전해 올 때의 희열은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분재가 햇볕을 받아 나날이 초록빛을 더해가는 것을 지켜 볼 때면 “생명의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이다”라고 했던 괴테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분재와의 교감에서 오는 경이와 환희의 순간이 오래 지속 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즐거움은 잠시일 뿐, 영원한 것은 아니며 한 순간이 영원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장 24절)라고 베드로는 말하지 않았든가.
모든 것은 때가 있다. 분주한 일상에 전지의 때를 놓쳤었다.
한 해 동안 가지치기를 제대로 해주지 않아 마치 몸의 한 부분이 시름시름 병들어가는 것 같아 께름했다.
삶의 분주함이 영혼과 내면을 시들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삶 자체를 살아내는 것이 그토록 어렵기만한가.
분재의 생기 있던 잎이 생명력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으나 자정 능력에 의해 시들어가는 잎을 스스로 떨구어 내고 있다.
재빠르게 전지가위를 찾아 가지치기를 시작한다. 짙은 초록의 잎을 자랑했던 많은 가지를 쳐내는 작업에 앞서 선뜻 가지에 가위를 대기가 쉽지 않아 망설여진다.
오랫동안 정성들여 가꾸어 온 애착심 때문이리라.
애착심을 버릴 때 새로운 가지에서 키워내는 싱그러운 잎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지치기를 계속했다. 전지가위에 끈끈한 수액이 묻어 나오는 것을 눈여겨본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이 아닌가.
가지치기 당한 나목의 고통스런 신음이 전이되어 오는 것 같아 아픔처럼 느껴진다.
분재가 전지 후 고통 속에서 생명력을 키우기 위해 추운 긴 겨울을 견디어내야 하리라.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아 움을 틔우고 새순을 돋아나게 하며 녹음이 짙어가는 여름에 줄기를 키워 잎을 무성하게 할 가을의 과정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분재의 사계를 통해서 인생 사계절의 교훈을 얻게 된다.
인간 세상사도 이처럼, 인내하고 기다려야 할 과정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닌가.
고통 가운데서 해결해야 할 인간 실존의 어려운 문제를 대하는 태도와 그 방법을 배우며 참고 기다려야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곧 봄의 숨결로 태어날 새 생명과의 만남을 위해 가슴이 마냥 벅차온다.
분재에게 말을 걸어본다. ‘잘 견디어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