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 가족 호칭에는 외가와 친가 구분 없이 할아버지면 다 할아버지요 친손자 외손자를 선별 없이 나누어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 산뜻하게 받아들여진다. 출가외인 개념도 바뀌어 가고 있기에 아들이라해서 딸이라해서 반가워할 일도, 서운해할 일도 물론 아니다. 딸이든 아들이든 경이로운 생명 탄생의 신비함에 몰입하며 소중한 기쁨임에 집중해야 할 일이다. 생명공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하더라도 생명의 신비는 풀려나지 않을 것이라서 주어진 생명의 기적을 감사로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가부장적 가족 형태의 전통성이 불합리한 시대를 가로지르지 못한 부조리의 단천이 남아선호 사상이다. 딸이든 아들이든 부모는 본능적인 사랑으로 품을 수 밖에 없음이라서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며, 어떠한 정황에 처하더라도 부모는 자식편에 서서 이해해주고 인정해주고 사랑으로 감싼다.
시대의 전유물처럼 자녀양육이 엄마 쪽으로 기우는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갓 태어난 유아기로 부터 모유로 키워야 하는 불가분적 습생의 비롯이라서 아빠의 육아 참여도가 모성을 뛰어넘지 못함을 인정하기에 모든 아내들은 작은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 만으로도 만족해하고 감사해 한다. 신비한 모성 본능을 뛰어넘을 순 없지만 아빠들의 육아 참여는 고결하고 성스럽기까지 하다. 시대의 아름다운 변천이리라. 자식은 부모의 에너지 소용돌이에 빨려들 듯 엄마, 아빠 품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럽고 온당하다 할 것이다. 한데 엄마들이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모성본능은 단순한 매력이라기 보다 수련된 품격처럼 돋보이기도 하고 우주와의 시너지 효과를 도모하는 듯한 신비감 조차 묻어난다. 어머니 사랑은 모방할 수 조차 없는 원천의 고고하고 독특한 영기를 품고 있다. 모든 용납의 영역을 무한대로 배분 받았다는 착각마저 인다. 신비롭고 막중한 희생과 노고가 깃들어 있기에 모성애는 고결한 사랑의 발원으로 세상 끝날까지 흐르고 흘러내릴 것이다.
8대 장손 맏며느리의 자리에서 딸만 넷을 낳은 칠거지악을 범한 여인에게 딸 넷을 품는 일이란 깎아지른 절벽 아래 협곡을 지나는 시간들이었다. 여자란 여일한 수용가치가 없던 시대를 건너오는 동안 생명의 소중함을 앞지르는 남성 위주 세상이 어찌나 좁은 도량으로 보였던지. 여자라는 까닭에 감수해야 했던 불이익을 어찌 다 풀어낼 수 있으랴. 사위에게 딸 손을 꼬옥 쥐어주며 함께 떠나 보내고 동그마니 남은 빈 둥지 부피는 허공과 다름 없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하나님 부르심에 순응한 소명자 반열에 부단히 서있기를 기도하게 되는 야무진 절조를 지켜내기에 이르렀다. 딸내들 모두가 현모양처 자리를 담담하게 물 밑 같은 평온함으로 감당해내고 있는 모습에는 극광의 아우라가 번져난다. 빛 부신 섬광이 삶의 효시가 되어준다. 딸내들의 삶이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쉼 없이 기도 드리고 있다. 간간히 나누는 이메일 속의 메시지로 노년에 찾아 드는 생기의 추락을 가벼이 깃털처럼 날려보내주곤 한다. 딸내들의 은은한 목소리 만으로도 뜨거운 온기가 용솟음으로 솟구친다. 이민 1.5세로 자라준 딸들이다. 낯선 이방인으로 감당해내야 했던 삶의 무게를 견뎌내었고 사방이 막힌 것 같이 삶의 보루가 우겨쌈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에도 딸들의 늠름한 행보에 숨통이 트이기도 했었다. 딸들과의 대화는 열린 음악회 같다. 그 틈새로 상큼하게 밀려드는 바람결 같이 줄기차게 모녀수채화를 그려갈 것이다. 행복 고지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주춧돌이 되어준 딸들이 가상스럽기 그지없다.
필부로 살아가기를 바램 했던 딸들이었는데 각자의 자리를 영향력 있는 삶으로 주도하고 당당하게 늠름하게 걸어가는 의젓한 삶의 행보를 지켜볼 수 있게 해주심도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녀수채화는 햇살 한줌을 준비된 화폭에 쏟아놓은 것 같이, 햇살이 곰실곰실 번져나듯 퍼져나간다. 맑은 색조로 딸내들 마음 폭이 잔잔한 호수 닮음을 밀도 있게 그려내다 보면 딸들의 싱싱한 웃음이 화폭 속으로 후두둑 후두둑 감사가 되어 흘러내린다. 숨길 수 없는 사랑이 물씬물씬 묻어나는 따습은 그림을 어느 때까지라도 그려낼 수 있는 엄마와 딸이라서 모녀 수채화는 계절 불문 소복하니 모티브와 테마가 쌓여있어 나이 들어버린 엄마는 하냥 행복하다. 가슴 저리도록 넘치는 감사들로 눈물겹다. 모녀 수채화는 농익은 사랑의 밀어들이 그려낸 최상의 예술로 승화되고 있음이다. 세대를 초월하는 소중한 보루요, 자자손손 이어지며 그려낼 아름다운 연서이자 가족 사랑 바탕이 진주의 영롱함으로 알알이 박힌 살아있는 역사서이다. 팔불출 호들갑인가, 면구스럽다. 딸내들의 핀잔을 어찌 감당할까 싶다. 가슴으로 그려내는 모녀 수채화는 가정의 달, 5월의 향훈으로하여 코로나 횡포에도 더 조밀하고 짙은 농후함을 이끌어낸다. 애틋하고도 처연한 관계 앞에 친숙한 파동이 충만을 넘어 가슴에 영원한 불을 지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