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권명오
수필가· 칼럼니스트.
Ⅰ한국 38년(54)
안양 탄약고 경비중대 파견
뜻밖에 행운의 기회가 왔다. 예비 사단으로 있던 우리 26사단 76 연대1개 중대가 안양 국도변에 산재해 있는 탄약고 파견 경비를 하게 됐고 운좋게 위생병 4명 중에 내가 차출 됐다. 나는 대방동 인근 공군사관 학교가 있는 낙골부락 탄약고에 파견되는 1소대에 위생병으로 근무하게 됐는데 소대장 김 중위는 정기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 원리 원칙을 실천하고 솔선 수범하는 지적인 장교였고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도 많아 위생병인 나와는 인간적으로 소통이 잘되고 친구처럼 지내게 돼 남녀 관계 등 사회 전반에 관한 문제를 서로 의논하는 사이였다.
탄약고 경비병들도 군생활이 편하고 좋은 때문인지 환자도 발생하지 않아 위생병인 나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책장사를 하고 또 교수들이 훌륭한 연기자 배우가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된다는 말을 잊지않고 기회와 시간만 있으면 책을 읽었다. 나는 파견 근무자라 숙소가 따로 없어 소대원 막사에서 자야 하는것이 불편 했는데 소대장(미혼 )이 자기의 민간인 숙소에서 같이 있자고 해 소대장과 함께 자고 출퇴근하는 특혜를 누리며 편한 군생활을 했다. 주말이면 명동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연극에 대한 꿈을 키웠고 또 대방동 고등학교 동창 이기행군과 최원용군과 회포를 풀었다. 주중에는 탄약고가 있는 낙골부락 잡화 가계로 가 소대 고참병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잡담과 흥미있는 일거리를 찾았다.
그러던 어느날 가계 안쪽 벽에 걸린 결혼기념 가족사진을 보게 됐고 사진 중에 예쁜 여학생을 발견한 나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새로운 일거리에 발동이 걸렸다. 군에선 이면 체면도 없고 불가능도 없고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곳이라 또 미쩌야 본전이라 닥치면 무엇이던 할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 사진 속에 있는 여학생이 문학소녀라고 해 호기심이 훨씬 더 컸다. 나는 언니 되는 분에게 편지를 쓰겠으니 나에 대한 소개를 잘해서 이해를 시켜 달라고 마구 억지를 부렸다. 하루에도 몇번씩 계속 졸라되니 학생의 언니가 귀찮았든지 그렇게 하라며 이름과 주소를 주면서 동생에게 연락을 해 놓겠다고 했다.
첫번째 편지는 심혈을 기울여 썼는데도 답장이 안 왔다. 당연한 것인데도 자존심이 상해 죄없는 언니 되는 분에게 심하게 항의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언니 되는 분이 둥생을 만나고 와 나에게 동생에게 편지에 대해 물으니 깔깔 대면서 국어책 잘 읽었다고 했단다. 시큰둥한 언니분에 대해 화가 났지만 무모한 내 탓이라고 심시숙고한 후 다시 편지를 썼다. 편지를 읽어주어 감사 하다는 예를 곁들여 진솔하게 총력을 다해 펜팔의 정도를 지키는 글을 썼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답장이 왔다. 그후 우리는 3년간 얼굴도 못보고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인연이 돼 그 여학생과 56년 이상 지금까지 부부의 연을 맺고 행복을 누리고 있다. 이 어찌 역사적인 중대사가 아닌가. 만약 군대를 안 가고 안양 탄약고 파견을 가지 않았다면 내 운명은 전혀 다르게 전개 됐을 것이다. 낙골부락 언니의 기념가족사진이 행운의 열쇠가 된 것을 감사하며 낙골부락과 언니에게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