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권명오
수필가·칼럼니스트
Ⅰ 한국 38년(24)
또 다시 떠나게 된 피난
빛나는 오월의 태양 아래 산과 들에 새싹들이 힘차게 솟아나고 꽃피는 농사철이라 씨를 뿌릴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지프차를 타고 영국군 장교와 통역이 마을로 들어 오고 그 뒤를 따라 트럭들이 들어 왔다. 차에서 내린 영국군 장교는 통역에게 피난을 가라고 했고 그리고 지금 당장 트럭을 타고 떠나라고 했다. 그야말로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다. 또 피난을 갈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히고 앞이 캄캄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영국군 장교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피난을 가라고 하는 것이라 감사해야 되고 또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 지난번 영국군 장교가 피난을 가라고 했을 때 다음날 가겠다고 했다가 중공군이 처들어 와 죽을 고생을 했던 경험도 있어 우리는 급히 필요한 양식과 피난 짐을 싸 가지고 트럭에 올랐다.
차는 말없이 무심하게 출발했고 멀어지는 삶의 터전이 전화로 잿더미가 됐으나 그래도 농사를 짓고 평화롭게 살 수있는 방공호와 내 땅을 두고 떠나야 하는 심정이 너무나 착잡하고 아팠다. 멀어저 가는 집터와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우리는 영국군 트럭 위에서 각가지 상념에 잠기게 됐다. 계속 달리는 트럭은 서울을 지나 한강을 건너간 후 어느 주택가 공터에다 우리를 내려놓고 말없이 떠나갔다. 풀밭 공터에 내려진 우리에게 이웃 주민들이 전쟁에 대한 상황을 물으면서 자기네들도 또 피난을 가야 되는것이 아니냐며 걱정들을 헸다.
훗날 알게 된 일 이지만 그곳이 서울 공업고등학교가 있는 영등포구 대방동이었다. 해가 저물 때 공터 옆집 주인이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해 주어 편히 하룻밤을 쉬게 됐다. 그런데 휴전 후 내가 바로 그 곳 그집 건물에 가게를 얻어 책 장사를 하면서 낙양 공업 고등하교 현 중대 부속 중,고등 학교를 다니게 됐다. 사람의 인연과 운명이란 참으로 알길이 없는 것이다.
영국군이 우리를 한강 건너로 피난 시킨 이유는 서울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나 다름없어 더 남쪽으로 가기로 결정 했다. 아버지는 수원에 살고있는 조카뻘 되는 권덕형 형님댁으로 가서 살길을 모색 하기로 하고 아침 일찍 피난 짐을 싸들고 떠났다. 여동생은 걷다가 힘이 들면 업고 가야했다. 철길을 따라 수원 80리 길을 걸으면서 1.4 후퇴 당시 야밤에 떠났던 형이 어디에 있는지 무사한지 그리고 우리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또 전쟁은 언제 끝날 것인지 다시 고향에 돌아가 옛날처럼 평화롭게 살 수가 있을 것인지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힘이 들고 배가 고프고 다리가 아파도 참고 걷고 또 걸었다.
해 질 무렵 수원 덕형이 형집에 도착한 우리는 형님의 친절한 배려로 편히 쉬게 됐고 뜻밖에 혼자 피난을 갔던 형도 그 곳에서 만나게 됐다. 수원은 평화롭고 안전 했으며 덕형이 형은 극진하게 우리를 우대 했지만 계속 신세를 질 수가 없었다. 전쟁 중이라 누구나 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형편이였다. 그 때문에 하루속히 따로 살 수 있는 거처를 찾아야 했고 아버지는 도시에서는 먹고 살 길이 없고 또 더 이상 남으로 피난 갈 이유도 없다면서 농가로 농사 품팔이라도 하고 살 수 밖에 없다며 농가를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