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말이라고 해서 다 선한 말이라고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진리라고 해서 누구한테나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언제나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는 동기가 잘못되면 천상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지고 말해도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상대를 잘못 알고 진리를 이야기하면 그 진리는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떨어져 버립니다. 적용이 잘못되면 비록 진리라 할지라도 선한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이것이 욥의 세 친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첫번째로 실수한 것이 있습니다. 응보의 법칙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와 고통의 문제를 푸는 마스터 키처럼 생각한 것이 그들이 범한 큰 실수 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한 가지 공식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 만큼 심오합니다. 인생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은 그 뿌리가 너무 복잡해서 한 두 가지 이유로 설명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하면 벌이 따르고 고통이 온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입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죄값은 아닙니다. 악한 자는 반드시 망하고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십시오. 악한 것을 뿌렸지만 그대로 거두지 않고 형통하게 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선한 자라고 무조건 형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욥기 4장7절에서 엘리바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그가 주장하는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반드시 이런 공식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일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친구들은 자기 말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장담을 했습니다. 그들은 욥의 손발을 응보의 법칙이라는 공식으로 묶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문제 였습니다. 그러니 욥이 참다 못해 이렇게 쏘아 붙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기 21장7절을 보세요.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다시 말하면  악인들이 어떻게 저다지 세력이 강하게 한 생을 보낼 수 있느냐, 이런 사람을 놓고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가끔 보면 욥의 세 친구가 범했던 것과 같은 오류들을 범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성구 하나를 들고 나와서 마치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도통한 것처럼 떠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너희들을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램29:11) 이 말씀 하나가 마치 모든 진리를 대변해 주는 것처럼 들고 나와서 “하나님은 평안을 주시려고 하는데 너는 왜 불행을 당하고 있니”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겠니” 하는 식으로 내몰아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23장25절에서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그런데 이 말씀 하나가 성경말씀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찿아가서 기를 죽이는 못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했어 예수 잘 믿으면 절대 아프지 않다고 그랬어? 그런데 너는 어떻게 된일야”하는 식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말을 잘 하는 지혜 이것이 참으로 중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