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 권명오
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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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한국 38년(3)
일본 항복과 8.15 해방
다께나리 교장이 진주만 폭격 승리를 위해 오늘은 수업이 없다고 해 나는 신이 났을 뿐 일본이 승리를하고 하와이 진주만이 초토화 됐거나 말거나 또 미국이 어디에 있고 무슨 일이 생겼든 알 바가 아니였다 . 그보다 처음 먹어본 모찌 ( 찹살떡 ) 맛이 너무 기가 막혔다. 그렇게 맛있는 떡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때 그 맛을 80이 넘은 지금 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꿀맛 같던 모찌 ( 찹살떡 )가 수 많은 미군 장병들을 수장 시키고 미,일 전쟁의 도화선이 되고 일본이 패망을 하게 된 비극의 모찌 ( 찹살떡 )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2차 대전이 치열했던 일제 말 일본의 압박이 날로 극심 해 졌다. 아버지는 농사를 많이 지어도 공출로 다 빼앗긴다며 왜놈들 때문에 못 살겠다고 농지를 다 양도 해 버렸다. 그리고 농장 감독직도 사퇴를 했다. 아버지는 무학자 였지만 어깨 넘어로 배우고 익힌 실력이 대단했고 필체 또한 뛰어났다. 아버지는 봄, 가을 일년에 두번씩 서울 농장 사장집에 상경해 농장 현황과 추수 상황 보고를 하면서 사장과 간부들과도 친분이 두터워졌고 2차 세계대전과 미,일 전황에 대한 소식도 듣고 와 마을 사람들에게 일본이 곧 패망 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내심 일본이 망하지 않게 도와 달라고 빌었다. 참으로 한심한 바보였지만 모르는 것이 죄요 병이였다. 일본 정부는 어린 아이들에 대한 세뇌 교육을 가장 중요시 했다. 그 때문에 그 동안 전교조들이 시행한 이념과 사상교육의 후유증이 심각해진 상태다. 1년에 한번 정도 일본에 있는 작은아버지가 오면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인사를 했고 작은어머니는 일본사람 이였다. 나는 공연히 어깨에 힘을 주고 작은 아버지를 따라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작은아버지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몇달 후 서울에 있는 아버지 친구가 바퀴 세개가 달린 오토바이 두대에 이사짐을 잔뜩 싣고 왔다. 그 당시 서울은 미군의 폭격 대상이 된 까닭에 급히 시골로 피난을 온 것이다. 아버지 친구 '진형구' 아저씨는 학벌도 좋고 실력도 있는 분인데 일본 정부 기관에서 일 할 수 없다며 적성농장 사장 밑에서 일을 했고 아버지와도 친분이 두터워 졌기 때문에 서울이 위험해 지자 안전한 시골 우리집으로 피난을 온 것이다. 둘째 아들 찬식이는 나와 동갑네라 친해 졌고 순수하고 착한 시골 사람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진형구 아저씨 가족을 귀빈처럼 우대하고 너도 나도 농장물들을 가지고 왔다.
며칠 후 '박영낙' 이란 아저씨 처 조카가 라디오를 가지고 왔는데 그 사람이 서울 갑부 화신 백화점 “박흥식” 사장의 조카였다. 그가 가지고 온 라디오가 처음 보는 요술상자 였다. 그 상자애서 나오는 신기한 뉴스와 노래와 만담을 듣기 위해 밤이되면 마을 사람들이 우리집으로 모여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 전투기가 미군기에 격추돼 추락했고 집안에서 열심히 혼자 라디오를 듣고 있던 진형구 아저씨가 밖으로 뛰어 나오며 “일본이 항복 했다. 해방이 됐다” 고 외쳤다. 그리고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동네 사람들도 아저씨 따라 만세를 부르며 일본이 망했다고 흥분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36년의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이 된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함성과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