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고용된 헨리 허드슨은 1609년에 지금의 뉴욕시와 그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 일대의 땅을 아마 지금의 올바니 북쪽까지 탐험하였다. 그 후에 있은 네덜란드인의 항해로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 주장과 초기 정착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 북쪽을 차지한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인의 최초의 관심은 모피무역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네덜란드인들은 모피가 나오는 오지에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로키 인디언 5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617년 네덜란드의 정착민들은 허드슨강과 모호크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요새를 건설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올바니이다. 맨하탄도 정착은 1620년초에 시작되었다. 이 섬은 1624년에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24달러를 주고 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섬은즉시 '뉴암스테르담'으로 명명되었다.
허드슨강 지역으로 정착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농원 지주" 제도로 알려진 일종의 봉건적 귀족제도를 장려했다. 1630에 허드슨강 유역에 그 최초의 거대한 농원이 설치되었다. '농원 지주'제도하에, 4년 동안에 자기의 농원에 50명의 성인을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는 25킬로미터 길이의 강변땅과 독점적인 어로권과 사냥권 그리고 자기의 땅에서의 민사상 및 형사상의 관할권이 부여되었다. 그 대신 그는 소작인들에게 가축과 농구와 건물을 제공해야 했다.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바치고, 지주에게 잉여 농작물에 대한 '우선적 선택권'을 부여했다. 이들 네덜란드인과 유대를 가지고 있는 스웨덴의 한 무역회사가 그로부터 3년 후에 그보다 남쪽의 델라웨어강 연안에 최초의 정착지를 설치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착지를 공고히 할 방편이 없었던 스웨덴인 촌은 네덜란드인의 정착지에 흡수되고 말았고, 이 땅은 후에 펜실베이니아와 델라웨어로 발전했다. 1632년 캘버트 일가는 찰스 1세로부터 포토먹강 이북의 땅을 개발할 수 있는 특허를 얻었다. 지금의 메릴랜드이다. 이 특허장은 비개신교 교회의 설치를 명백히 금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캘버트 일가는 같은 신앙의 카톨릭 교도들이 그곳에 정착하도록 권장했다.
메릴랜드 최초의 읍인 세인트 메리 읍은 1634년 포토먹강이 체사피크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어귀에 건설되었다. 캘버트 일가는 영국에서 차츰 종교적 박해에 직면하게 된 카톨릭 교도를 위한 피난처를 마련하는 한편, 이문이 있는 자산을 일구는 데에도 관심이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영국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개신교도들의 이민도 권장했다. 캘버트 일가에게 수여된 칙허장은 봉건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가 혼합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장원을 만들 권한을 부여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인(재산 소유자)의 동의를 얻어서만 법률을 제정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착민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리고 자기들의 소유지로부터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장원의 소작권이 아니라 그들에게 농토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립 농가의 수도 늘어났으며, 그 소유주들은 식민지 운영상의 일에 대한 발원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메릴랜드 최초의 입법원은 1635년에 첫 모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