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길에서 무념하니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평소 습관이 되풀이되듯 여상스레 걷던 길이었는데 뜬금없이 엉뚱스런 발견을 하게되었다. 공원에 띄엄띄엄 놓여있는 벤치도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하고, 우거진 나목 조차에도 틈과 간각이 있고 기후도 창조 이후로 변함없이 자연을 보존하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생태계가 지탱되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물리적인 간격을 견지하고 있음을 새삼 보게되다니. 부질없는 한가로움에 젖었나 보다. 도심 건물도 주택가의 집들도 너비와 간격을 스스로 조절하듯 연잇기도하고 서로의 사이를 유지해가며 마치 서로를 인정하며 개체가 좋아할 만한 콘탠즈를 구가하며 사이사이의 공학 창조를 누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모든 것의 사이와 틈새가 적절함을 유지하며 편의를 공유하는 질서 앞에 오래 굳어진 관성이 습관이 되듯 반복되는 타성의 물결이 적용되고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격과 틈에도 마음이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황은 물리적인 관련성의 기울임에만 멈추지 않고 그 연관성에도 참견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관관계를 대입해봄직도 하겠지만 공통된 공식으로는 관계창출이 불가능하다 하겠다. 오랜 여운을 가진 관계를 세워가기 위해 일방적인 노력이나 이해만으로는 매끄러운 관계의 정립은 어렵다는 것이다. 일인칭을 기준으로 이인칭의 상대는 각양각색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서 다양한 대응이 필요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란 종국엔 사람을 대하는 안목으로 요약 되기도 한다. 또한 세월의 은혜를 덧입음으로 인연들의 돌출적이고 돌발적인 개념에도 그럴 수도 있지가 점진적으로 늘어나게되기 마련이긴 한데도 자신을 드러내기에 분주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 얄팍한 계산을 깔고 관계를 시도하는 사람, 고자질이나 이간질하는 사람들 보다는 차라리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나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경스런 마음까지 들기도 한다. 인간의 죄성은 도토리 키재기라서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오히려 악하기 그지없는 사람보다 대하기가 힘들다는 판단의 추리를 이끌어낸다. 기회의 여분을 열어 양보하고 기다려주고 참아주는 것도 무용지물인 사람은 차라리 무관심해져 버리는 것이 옳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되는 경우도 있다. 여린 감성 분포가 관계로 인하여 마음을 뺏기는 불상사를 유발하고 끌꺼럽고 어설픈 익숙치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한다.
이러 저러한 시행착오로 사람 사이의 거리나 공간 유지는 개인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중요한 덕목이요 자산이라서 인생의 성공 여부로도 주목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혹여 사람 사이를 간격을 두자는 것이 아닌가 우려의 소리도 있겠지만,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얼마큼이면 될까. 인간 관계 에너지의 낭비를 줄여보고 싶은 열망으로 인정해주고 싶다. 가깝고 친하다는 농도는 서로가 느껴야하는 것이라 일방적인 친함을 강조하다보면 키가 차이가 나는 사람끼리 이인삼각 경기에 임하는 것과 진배 없음이다. 배려가 부족한, 상대를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도 편안하고 상대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 희귀한 시대로 돌입했다. 너무 들이대거나, 함부로 하대하지 않으며, 최적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하지않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란 미묘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면이 있다. 적절한 사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상대의 인격을 소중히 여길줄 알아야할 것이다.
아무리 치밀한 물리적 구조라도 적절한 공간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듯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선 서로의 존재성 확립을 인정해주어야할 것이다. 너무 가까워지려 하기보다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적절한 나눔과 끌어당김으로 불가근불가원을 지속하는 것이 보루인 것 같다. 강 건너 잔디가 오히려 푸르고 아름답지 않은가. 최상의 아름다움은 적정한 거리에서 제대로 발견할 수 있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꾸밈없는 사이의 행간 마련이 우선되어야 하지않을까. 공감의 부분을 확장해가며 서로의 품새에 낙서 같은 아픈일을 만들지말며, 화려하진 않아도 가슴을 파고드는 미덕을 다듬어내며, 단순하고 평범하지만 서로 저속하지 않으려는 상승작용을 적용해야하리라고 본다. 관계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