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서 5km 달리면 가파른 절벽

‘산기슭 위 형형색색 가옥들로 빼곡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 모여 형성

‘영화속 익현이 아이들과 살던 동네

‘지역예술가 손길 거쳐 문화마을로

‘한국의 산토리니’애칭처럼 눈부셔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건달 세계에도 룰이라는 게 있는데….”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년)’에서 조직폭력배 보스인 최형배(하정우분)는 이권을 다투는 김판호(조진웅분)와의 싸움에 부하들을 동원해달라는 최익현(최민식분)의 부탁에 말끝을 흐린다. 두 사람은 같은 경주 최씨로 형배가 고손자뻘이다. 형배가 한때 한솥밥을 먹던 판호를 쳐야 한다는 사실에 망설이기만 하자 참다못한 익현은 “니캉 내캉 가족이라는 것보다 더 큰 명분이 세상에 어디 있노”라고 다그친다.

‘범죄와의 전쟁’은 연줄이 능력을 압도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갱스터 장르에 얹어 실어 나르는 영화다. 한때 유행처럼 양산된 조폭 코미디들 가운데 예리한 통찰과 독창적인 캐릭터로 홀로 반짝였던 이 영화. “살아 있네~”라는 걸쭉한 사투리의 유행어를 낳은 이 영화. 오늘 우리는 ‘범죄와의 전쟁’을 만나러 부산으로 떠난다.

부산역에서 차로 5㎞ 정도를 달리면 가파른 절벽 위에 주택들이 모인 ‘흰여울문화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부산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속살을 간직한 곳이다. ‘부산의 산토리니 마을’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눈부신 풍광을 자랑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슴 아픈 현대사의 그늘이 자리한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갈 곳 없는 피란민들이 산기슭 주변으로 모여들면서 형성됐다. 전쟁 이후 폭발적으로 유입된 인구를 도시 인프라가 감당하지 못하면서 아찔한 경사지에 허름한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선 것이다. 마을의 이름은 주택가 형성되기 전 절벽을 따라 바다로 굽이치는 물줄기가 하얀 물보라처럼 아름답다는 데서 유래했다.

흰여울문화마을은 익현이 세관 직원으로 일하던 시절 살던 동네다. 없는 형편에 자식을 셋이나 낳는 바람에 간간이 뇌물을 받아 챙겨도 늘 빠듯한 살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가 조직의 비리를 무마하기 위해 익현에게 총대를 메줄 것을 강요하자 익현은 미련없이 일자리를 내던진다. 비가 쏟아지는 여름 익현이 가족들과 함께 이삿짐을 챙겨 이 마을을 떠나는 순간 민간인에서 깡패의 세계로 진입하는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도 함께 시작된다. 먼 친척이자 조폭 두목인 형배와 손을 잡은 익현은 공무원 생활을 통해 얻은 인맥을 활용해 이내 부산 지역을 주름잡는 거물로 성장한다. 형배는 그런 익현을 ‘대부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따른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선박들을 구경하며 계단을 내려가면 가옥들이 늘어선 골목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담벼락과 지붕은 지역 예술가들의 재능에 힘입어 알록달록한 빛깔로 꾸며졌고 골목 곳곳에는 나들이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카페가 자리한다. 미로처럼 꼬불꼬불 얽힌 샛길은 여행객을 호기심으로 들뜨게 하지만 이마저도 수십 년 전 험난했던 피란민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면 옷깃을 가만히 여미게 된다. 골목 아래에는 해안 산책로가 자리하는데 지그재그로 형태로 이 두 장소를 걸으면 색다른 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여행으로 허전해진 배는 중앙역 인근의 중식당 ‘동궁’에서 채우면 ‘범죄와의 전쟁’ 투어가 완성된다. 형배가 탕수육을 씹어먹으며 익현을 차갑게 돌려세웠던 바로 그 장소다. 식당 벽면은 영화 포스터와 사진으로 도배돼 있고 영화를 기억하는 방문객을 위한 ‘하정우 먹방 세트’도 판매한다. 영화에 직접 출연했던 화교 출신의 사장이 지금도 식당을 운영 중이다.

물보다 진한 피의 신성한 이름 아래 영원할 것만 같던 형배와 익현의 결탁은 금세 깨진다. 애초에 노는 물이 달랐던 두 사람의 사이를 벌려놓는 것은 수컷들의 유치한 허세다. 영화 속 대사처럼 ‘득(得)이 되면 친구고 안 되면 원수인’ 깡패 세계에서 익현은 가족과 자신이 살기 위해 형배의 발등을 찍는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역시 익현과 형배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잔뜩 멋을 부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대목이다. 누구도 그들의 거침 없는 발걸음을 막지 못하고 배경음악인 ‘풍문으로 들었소’가 왕의 행차를 알리는 풍악 소리처럼 흥을 돋우던 시절이었다. 이때만 해도 형배와 익현은 이렇게나 빨리,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파국을 맞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깃털처럼 가볍고 덜컹거리는 빈 수레보다 요란한 깡패들의 허장성세다. 

<글·사진(부산)=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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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산토리니 마을’로 불리는 흰여울문화마을의 풍경.           <사진제공=영도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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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당‘동궁’의 벽면에 영화 장면을 활용한 메뉴가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