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맹작가의 사이버스페이스‘매트릭스’의 원조
기계장치 삽입 두뇌 용량 확장된‘신인류’예언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윌리엄 깁슨이 만든 사이버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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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에 애플이 세계 최초의 PC를 세상에 선보였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84년 캐나다에 살던 어느 미국 출신 작가가 ‘뉴로맨서(Neuromancer)’라는 장편 SF소설을 출간했다. 이 작품은 SF문학사는 물론이고 세계 문화사에서 이전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스타일의 지평을 연다. 바로 ‘사이버펑크’ 즉 컴퓨터 정보통신 기술에 능숙하면서 사회적 통념이나 관습에 저항하는 감성이 탄생한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도 이 작가가 처음 만들었다. ‘공각기동대’나 ‘매트릭스’처럼 가상공간 네트워크와 현실을 넘나드는 설정의 스토리텔링이 이 작품을 원조로 삼고 있다. 컴맹이었기에 60년 된 낡은 타자기로 ‘뉴로맨서’를 집필했다는 이 작가, 바로 ‘어두운 예언자(noir prophet)’라고 불리는 윌리엄 깁슨이다. 



■낡은 미래상을 단번에 뒤집어엎다

‘뉴로맨서’의 진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동료 작가인 브루스 스털링이 보낸 “이제 진부한 미래는 안녕!”이라는 찬사일 것이다. 그전까지 SF는 다양한 미래를 전망해 왔지만 첨단 과학기술의 상상이라는 포장이거나 심도 깊은 철학적 사변을 통해 현재를 성찰하는 메타포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뉴로맨서’는 낯설지만 강렬하게 근미래를 통찰하는 새로운 시각이 담겨 있었다. 컴퓨터 중심의 첨단 과학기술에 능숙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사회 체제나 권위에 순응하지 않는 펑크(punk)적 저항성을 내세웠던 것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지금 보면 식상할 정도이다. 해커인 주인공이 정체불명의 존재로부터 의뢰를 받아 현실과 가상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정보를 빼 낸다. 이런 설정은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된 지 오래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하고 디테일도 뛰어나서 흡인력이 상당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정서이다. 첨단 기술을 능숙하게 다루지만 결코 그것이 과학적 유토피아로 향한다는 환상이 없다. 몸에 기계장치를 삽입하는 사이보그 시술을 통해 신체 능력이 증강되었지만 마음도 그만큼 건조하고 냉정하다. 작품 속 사회 전체가 그런 정서로 채워져 있다.
‘뉴로맨서’의 젊은 주인공들이 드러내 보이는 하드보일드 누아르에 독자들은 열광했다. 사이버펑크라 명명된 이 새로운 감성은 ‘밑바닥 생활(low life)’과 ‘첨단 기술(high tech)’이 결합해서 탄생한 하나의 시대정신이라 할 만했다. 또한 사람들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무한대의 공간에 눈을 떴다. 

■과학기술, 인간을 얼마나 변화시키나

‘뉴로맨서’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몰리는 특수 렌즈를 눈 주위의 피부에 봉합해 붙여놓았다. 울고 싶을 땐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받자 눈물샘과 입을 관으로 연결해서 침을 뱉는다고 대답한다. 
인간이 과학기술을 만들고, 다시 그 과학기술이 인간을 변화시킨다. 사이버펑크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육체와 마음을 변형시킬 가능성을 과감하게 탐색한 장르였다. 
깁슨은 ‘뉴로맨서’에 앞서 1981년에 ‘메모리 배달부 조니’라는 단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를 영화화한 것이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코드명 J’인데, 이 작품은 사이버펑크 스타일과 사이보그 인간의 컨셉트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자신의 두뇌를 저장장치로 쓰는 주인공이 독점적 이익을 누리려는 다국적 거대기업의 음모에 대항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영화 속 시대 배경이 2021년인데 주인공의 두뇌 메모리 용량이 160기가바이트(GB)라는 것이다. 영화가 제작된 1995년에는 하드디스크 용량이 500메가바이트(MB) 안팎으로 아직 GB급 저장장치가 쓰이기 전이었다. 제작진들은 반도체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을 고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2017년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는 하드디스크의 용량은 테라바이트(TB)급, 즉 1,000GB 이상이다.
‘코드명 J’에는 사이보그 시술을 받은 인간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의 뇌신경이 기계에 이식돼 계속 현실에 관여한다거나 놀라운 전자두뇌 능력을 지닌 사이보그 돌고래가 나오는 등 생체와 기계 결합의 가능성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런 설정은 인간의 존재론적,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이보그 인류학’의 개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1985년에 ‘사이보그 선언’이라는 유명한 에세이를 발표했다. 여기엔 20세기말 인류의 속성을 예리하게 파악한 통찰이 들어 있는데, ‘기계와 유기체가 혼합된 거대한 키메라이자 사이보그, 바로 이것이 현대 인류’라는 것이다. 개개인이 사이보그 시술을 받는 차원을 넘어 인류 문명 자체가 과학기술과 호모 사피엔스의 결합이라는 거대한 사이보그로 변화했다는 의미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를 연출했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후속편인 ‘이노센스’(2004)에서 해러웨이의 이름과 외모를 그대로 오마주한 사이보그 심리학자를 등장시킨 바 있다. 
윌리엄 깁슨 
1948년 3월 17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출신의 과학소설가. 베트남전쟁 당시 징집을 피해 캐나다로 이주한 뒤 정착, 이중국적을 지니고 있다. 윌리엄 S. 버로스 등 비트세대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가 만들어낸 사이버펑크 장르는 SF의 영역을 넘어 학계는 물론이고 디자인, 영화, 문학, 음악, 사이버컬처, 기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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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깁슨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 영화 ‘코드명 J’의 주인공은 두뇌에 메모리 확장장치를 삽입해 기밀정보를 저장, 전달하는 일을 한다. 기계와 결합된 인간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콜럼비아트라이스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