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의 '문화의 헤게모니(Hegemony of Culture)'가 다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문화로 사람의 관심을 끌게 하고, 그 관심이 정치의 헤게모니의 포로가 되게 하는 그 결정적인 원인을 예리하게 지적한 시대의 통찰력이 있습니다. 이태리의 독재자 무솔리니(Mussolini)를 공포에 떨게 하였던 이태리의 지성 그람시의 탁견,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바로 이 공백기간이야말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는 때다."
낡은 것이 새롭게 탄생할 '부흥과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면 반드시 그것은 근절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병적 징후가 출현하는 것을 막은 왕이 있습니다. 그 왕의 이름은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입니다. BC 538년에 "소수인종의 포로귀환"의 기쁨을 안겨다 준 이국의 왕입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모국어 상실'이라는 치명적인 불행 속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포로유수에서 '출 바벨론(Out of Babylon)'할 수 있도록 위업을 이룬 위대한 왕입니다.
시편 126편은 바로 이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자는 예배자입니다. 이 예배자의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한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이 정상적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눈물의 씨가 필요합니다. 그 눈물의 씨가 마침내 싹을 틔우고, 그 싹이 자라서 이삭을 내고 그 이삭이 마침내 풍성한 수확의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막 4:26-29). 이 당연성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그 원인을 그람시는 '병적 징후'라 하였습니다. 이 병적 징후 중에 가장 치명적인 징후는 '느낌의 상실'입니다. 이 느낌의 상실은 시대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무디어진 게으름' 바로 그것입니다. 습관에 얽매여서, 아무 느낌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병적 징후 가운데 최악의 치명상을 가져다주는 원흉입니다. 무사안일주의, 문제는 여전히 있음에도 그 문제해결의 노력을 등한시한 채, '자기체면'에 빠져 느껴야 할 '결정적인 최적기(Golden Time)'를 놓치는 그것은 가장 심각한 '병적 징후'입니다.
시편기자는 이 병적 징후를 없애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눈물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시편기자의 눈물은 곧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눈물이 씨가 되어 땅에 뿌려짐으로써 그 눈물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눈물의 씨를 뿌리는 자는 바벨론 유수 70년을 마감시킨 '페르시아 왕 고레스'입니다. 신약시대는 초대교회의 7집사,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입니다. 신약시대의 초대교회를 든든하게 만든 눈물의 씨가 오늘의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눈물의 씨로 이룬 초대교회 이후에, 문화의 헤게모니와 정치의 헤게모니로 권력을 장악하여 나라와 역사를 어지럽히는 지금, 다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할 자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이 땅을 굽어 살피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지금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을 굽어 살피시며 하늘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고 돌아올 그 날을 위해 그 눈물의 씨앗을 다시금 뿌려야 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입에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 찬양이 가득차기를 원하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는 다시는 할 수 없는 일 가운데 지금 이 세상에서 다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는가?"라고 물으신다면, 시편기자의 고백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