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국의 군사적인 노력에는 전쟁의 정치적 목적에 관한 일련의 중요한 국제적인 회담들이 병행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회담의 첫 회담은 미국이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었으며, 군사적인 정세가 스산하게 보이고 있었을 때인 1941년 8월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사이에서 있었다.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근처의 순양함상에서 만난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다음과 같은 목표들을 승인한 목적 성명서인 대서양헌장을 발표했다. 즉 영토확대의 불허, 관계 국민들의 승인 없는 국경선 변경의 불허, 자신들의 정체를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국민들의 권리, 자주장부를 박탈당하고 있는 인민들의 자주정부 회복, 모든 국가들 사이의 경제협조, 모든 사람들의 전쟁, 공포,결핍으로부터의 해방, 공해의 자유, 그리고 국제정책의 수단으로서의 무력이용의 포기 등이었다.
1943년 1월 모로코의 카사블란카에서 개최된 영미회의는 무조건 항복조건이 아니면 추축국들 및 그들의 발칸 위성국들과 강화조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장한 이 조건의 목적은, 파시스트 및 나치의 대표들과는 어떠한 강화협상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대표들이 그들의 잔재세력들을 구출하기 위한 어떠한 흥정도 하지 못하게 하며, 또 독일 이탈리아 일본 국민들에게 최종적인 강화조건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들 나라의 군벌들이 전세계 앞에서 자신들의 완전하고도 전적인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들을 모든 참전국 국민들에게 다짐하려는 데에 있었다. 1943년 11월 22일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카이로에서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일본에 대한 조건에 합의했는데 이에는 일본이 과거의 침략에서 얻은 것들을 포기하게 한다는 조건이 들어있었다.
그해 11월 28일 테헤란에서 루스벨트, 처칠 그리고 스탈린은 새로운 국제기구인 국제연합(유엔)을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약 2년 후인 1945년 2월에 그들은 승리가 거의 확실하게 보이는 가운데 얄타에서 회담했다. 소련은 독일이 항복한 후 얼마 안되어 일본과 전쟁하기로 비밀리에 동의했다. 폴란드의 동부 국경선은 대체로 1919년의 쿠르존선으로 정해졌다. 독일로부터 받아낼 막대한 전쟁 배상-스탈린이 요구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반대했음-에 대한 의논이 있은 후에 그 결정은 연기되었다. 연합군의 독일 점령과 전범자들의 재판 및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가 마련되었다. 또한 얄타 회담에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대국들이 그들의 안보에 영향을 주는 문제에서 거부권 가져야 한다는데 합의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얄타로부터 귀국한지 2개월 후에 조지아 주에서 휴가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미국 역사상 그렇게도 심심한 애도를 받은 인물은 거의 없었으며, 한 동안 미국민들은 보상받을 수 없는 손실로 인한 허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주리주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S.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