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한국 38년 (9)
국군의 후퇴와 피난.
지천( ) 권명오
수필가·칼럼니스트.
민족 상쟁의 비극이 시작된 날 1950년 6월 25일 전선으로 가는 군인들의 우렁찬 군가를 들으며 국군들이 인민군을 물리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오산이었고 그 당시 전선으로 간 군인들은 그 길이 전사를 앞둔 마지막 길 이었고 목이 터져라 부른 군가가 애절한 장송곡이 되고 말았다. 나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외치던 국군들의 그 모습을 잊을 길이 없다. 우리는 6,25 당시 희생된 국군 장병들을 잊지 말고 영원히 받들어야 할 것이다.
6월 25일 오후4시가 되자 포성이 더욱 가까워 졌다. 갑자기 헌병들이 차를 타고 문산 시내를 돌면서 “시민들께 고한다. 속히 피난을 가라” 고 외쳐댔다. 몇시간 전만 해도 인민군 XX 들을 국군이 다 싹 쓸어 버릴 것이니 안심하라고 큰 소리 치던 헌병들이 피난을 가라고 독촉을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어쨌든 상황이 불리해지고 긴박해 진 것이 틀림없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리는데 철환이 형이 일단 서울 친척 집으로 피난을 가자고 해 할머니를 모시고 문산역으로 가니 피난민들로 만원사례였다.
우리는 다행히 운좋게 기차를 탔고 서울 신촌 철환이 형 친척집에 도착했다. 친척 아저씨는 당황해 하면서 상황을 자세히 묻고는 걱정을 함께 했다. 가족과 전쟁에 대한 걱정 끝에 잠을 설치고 일어나 보니 그 집 형편이 무척이나 가난한 편이였다. 철환이 형과 나는 고향 소식을 알아 보기 위해서 서울역으로 갔다. 그 곳에서 다행히 서울에 살고 있는 고향 사람을 만났는데 그 분들은 가족을 만나기 위해 금촌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린다며 금촌 인근 봉일천 국민학교에 적성 가월리 피난민들과 우리 가족들도 그 곳에 있다고 해 철환이 형과 나도 가족을 만나기 위해 금촌 가는 기차표를 샀다. 그런데 전쟁 때문에 북으로 가는 기차 시간이 계속 변경돼 기약없이 기다리게 됐는데 비행기 2대가 나타나 몇바퀴 돌더니 용산역 쪽에 폭탄을 투하 했다. 그것이 북한(러시아 ) 비행기가 서울을 처음 폭격한 장면이었다.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고 폭격을 끝낸 북한 비행기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우리는 그런 전황에도 가족을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출발하게 됐다. 기차가 신나게 달려 수색역을 지났을 때 별안간 비행기가 나타나 기관총을 난사해 기차 난간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나는 정신없이 기차 안으로 들어가 보니 승객들이 전부 다 납작 엎드려 있다. 기차가 정차를 하고 사람들이 뛰쳐 나가고 총탄을 맞고 피를 흘리는 등 아수라 장이 됐고 밖을 뛰쳐 나간 사람들은 논들 밭들로 마구 뛰어갔다. 군인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민간인들이다. 그것을 본 북한 비행기는 폭격을 중단하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북한 비행기는 북으로 가는 기차가 군인들이나 무기를 싣고 가는 것으로 판단하고 폭격을 가했으나 승객들이 민간인들이라 폭격을 중지 한 것이다. 기차는 다시 출발을 했고 승객 일부는 기차를 다시 타고 일부는 포기했다. 그 사이 철환이 형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혼자 기차를 탔다. 금촌역에 도착하니 어둠이 깔리고 거리엔 사람이 없다. 모두 다 피난을 간 삭막한 적막 강산이다. 나도 모르게 무작정 걸었다. 누군가 붙잡고 물어 볼 사람이 절실 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