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 유럽에서 대대적인 북아메리카 이민이 시작됐다. 그 후 300여년에 걸쳐 행해질 유럽인의 이주는 겨우 수백 명의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로부터 수백만 명의 대이동으로 발전했다. 강하고 다양한 동기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들은 아메리카의 북부에 새로운 문명을 이룩했다. 최초의 영국 이민은 스페인사람들이 멕시코, 서인도제도 및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한 훨씬 후에야 대서양을 건너왔다. 신세계로 건너온 초기의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작고 초만원의 배를 타고 왔다. 6주 내지 12주가 걸리는 항해중 그들은 아주 빈약한 식사로 살아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고, 배는 흔히 폭풍우를 만나 어떤 것은 난파하여 바다에 침몰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유럽 이민들은 정치적 탄압을 피하여, 또 종교의 자유를 찾아, 또는 고국에서는 그들이 누릴 수 없는 기회와 모험을 찾아 고국을 떠났다. 1620년부터 1635년 사이에 경제적 어려움이 영국을 휩쓸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숙련된 기술공들조차도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농작물의 흉작으로 그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직조공업이 생겨났는데, 직조기를 계속 돌리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양모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주들은 농토에 울타리를 치고 양을 기르기 위해 농민들을 쫓아냈다. 식민지의 확장은 이들 쫓겨난 농민들을 위한 출구를 마련해주었다. 신대륙에 온 식민지 개척자들의 눈에 먼저 비친 것은 짙게 우거진 숲이었다. 이들 정착자들은 우호적인 인디언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살아남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인디언들은 호박, 콩, 옥수수 등 이 대륙의 '토착' 식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쳐주었다. 뿐만 아니라 길이가 근 2,100 킬로미터에 달하는 아메리카의 동부 연해지방의 방대한 처녀림은 사냥감 짐승과 땔나무의 풍부한 원천이었다. 또 이들 원시림은 집과 가구와 선박을 건조하기
위한, 그리고 수출을 하기 위한 물건의 풍부한 원료를 제공해주었다. 신대륙은 천연자원이 풍부하기는 했지만 정착자들이 만들 수 없는 물건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유럽과의 교역이 절대로 중요했다. 그래서 대서양 해안지대는 그들 이민들에게 편리하게 이용되었다. 대서양 해안선에는 후미와 항만이 수없이 많았다. 오직 노드캐롤라이나와 뉴저지의 남부만이 원양 선박을 위한 항만이 없었다. 케네벡, 허드슨, 델라웨어, 서스큐해너, 포토맥 그리고 많은 큰 강들이 해안지대와 애팔래치아 산맥 간의 지역을 연결시켜 주었다. 그러나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 연결시켜주는 수로는 캐나다의 프랑스인이 지배하고 있는 세인트 로렌스강 뿐이었다. 짙게 우거진 삼림, 인부 인디언 부족들의 저항 그리고 애팔래치아 산맥의 어마어마한 장벽 때문에 정착민들은 해안의 평야지대 넘어로는 더 들어가지 못했다. 오직 덫 사냥꾼과 교역자들만이 황야를 뚫고 내륙으로 들어갔다. 식민지 건설자들은 처음 100년 동안은 해안 지대에 밀집하여 정착촌을 건설했다.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온 사람들의 많은 부분이 정치적 이유 때문에 왔다. 1630연대에 영국 찰스 1세의 폭정은 신대륙으로의 이주에 박차를 가했다. 그 후 1640연대에 올리버 크롬웰을 주동자로 하는 찰스 1세 반대파들의 반란과 승리로 많은 "왕당파" 기사당원들이 버지니어로 도망쳤다. 유럽의 독일어권에서는 특히 종교적 이유로 인한, 여러 소국 군주들의 탄압과 장기간의 전쟁으로 말미암은 황폐로 17세기와 18세기에 미국으로의 이주자가 늘어났다. 17세기에 이들 식민지 개척자들의 도래는 그 경비와 위험은 물론 면밀한 기획과 관리를 필요로 했다. 정착자들이 신대륙으로 오기 위해서는 바다로 5천 킬로를 여행해야 했고, 가재도구, 의복, 씨앗, 연장, 건축자재, 가축, 무기 및 탄약을 필요로 했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식민정책과는 달리 영국으로부터의 이민은 정부가 직접주관하지 않고 주로 이윤 추구를 동기로 하는 민간업자들이 주선하여 이루어졌다.